
1930년 4월 6일 아침, 인도 서해안의 작은 마을 '단디'. 예순 살의 마른 노인이 바닷가에 허리를 굽혀 소금 한 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한 줌이 대영제국의 소금 전매법을 정면으로 깨뜨린 행위가 되었고, 수많은 인도인이 그 뒤를 따라 법을 어기기 시작했다. 총도, 폭탄도 없었다. 노인의 이름은 마하트마 간디였다.
그는 3월 12일 사바르마티 아슈람을 떠날 때 78명의 동지와 출발했다. 24일 동안 약 385킬로미터를 걸었고, 길이 길어질수록 행렬도 불어났다. 그가 소금을 고른 데에는 계산이 있었다. 1882년 제정된 소금법은 인도인이 바닷가에 널린 소금조차 마음대로 만들지 못하게 했다. 소금은 부자도 가난한 이도 매일 먹는 것이었기에, 그 법을 어기는 일은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저항이 되었다. 행진 뒤 수천 명이 감옥에 갇혔다. 자와할랄 네루가 4월에, 간디가 5월 초에 체포되었다. 이 싸움은 이듬해 3월 5일 간디·어윈 협정이라는 휴전으로 이어졌다. 오늘은 인도의 간디가 태어난 날이다. 1869년 10월 2일에 태어난 그의 생일을 유엔은 '국제 비폭력의 날'로 정해 해마다 기린다.
유엔이 한 사람의 생일을 세계의 날로 만든 이유
유엔 총회는 2007년 6월 15일 결의 A/RES/61/271로 이날을 제정했다. 140개국이 공동 제안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결의는 이날을 교육과 대중 인식을 통해 비폭력의 메시지를 널리 퍼뜨리는 기회로 삼고, 평화·관용·이해의 문화를 다지자고 요청한다. 당시 결의안을 소개한 인도의 아난드 샤르마 외교담당 국무장관은 간디의 말을 빌려, 비폭력이야말로 인류가 손에 쥔 가장 큰 힘이라고 했다.
9월 21일 '국제 평화의 날'과 헷갈리기 쉽지만, 두 날은 결이 다르다. 평화의 날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말한다면, 비폭력의 날은 그곳에 이르는 길을 묻는다. 유엔은 올해 평화의 날 주제를 '평화에 투자하라'로 정했다.
한 사람의 생일이 세계의 기념일이 된 데에는 까닭이 있다. 간디가 보여 준 것은 '싸우지 않는 법'이 아니라 '다르게 싸우는 법'이었다. 그 방식은 그의 생전에 끝나지 않고 대륙과 세대를 건너 퍼져 나갔다.
소금에서 버스 좌석까지, 비폭력이 바꾼 지도
단디의 소금이 바다를 건너 닿은 곳 가운데 하나가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였다. 1955년 12월 1일, 재봉사 로자 파크스가 백인 승객에게 버스 좌석을 내주기를 거부했다가 체포되었다. 사실 그보다 아홉 달 앞서 열다섯 살 소녀 클로뎃 콜빈이 같은 이유로 끌려간 일이 있었다.
파크스가 체포된 이튿날, 조 앤 로빈슨은 버스 승객의 75퍼센트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적은 전단을 돌렸다. 12월 5일, 흑인 주민들은 시내버스 타기를 멈췄다. 그들은 걷고, 차를 나눠 탔고, 교회에 모여 서로를 붙들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그 중심에 섰다. 1956년 2월 1일에는 변호사 프레드 그레이가 콜빈을 비롯한 네 여성을 대리해 연방 소송을 냈다. 연방대법원은 그해 11월 13일 버스 인종분리가 위헌이라는 하급심 판단을 확정했다. 보이콧은 시작된 지 381일 만인 12월 20일에 끝났다. 거리의 걷기와 법정의 다툼이 나란히 간 것이다.
비폭력의 사슬은 말 그대로 사람의 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89년 8월 23일 저녁 7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주민 약 200만 명이 손을 맞잡았다. 탈린에서 리가를 거쳐 빌뉴스까지 6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이었다. 훗날 '발트의 길'로 불린 장면이다. 그날은 소련과 나치 독일이 발트 3국의 운명을 갈라놓은 독소불가침조약 50주년이었다. 리투아니아에서만 80만 명가량이 모스크바를 등지고 서쪽을 바라보며 섰다고 한다. 사슬은 15분가량 이어졌다. 세 나라는 1991년 8월까지 독립을 되찾았고, 그해 9월 17일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숫자도 이 흐름을 뒷받침한다. 미국의 민주주의 연구 기관 프리덤하우스는 2005년 보고서 「자유는 어떻게 쟁취되는가」에서 1972년 이후 독재가 무너진 67개국을 분석했다. 그 가운데 50개국, 곧 70퍼센트가 넘는 사례에서 비폭력 시민 저항이 결정적 동력이었다. 대규모 시위와 불매, 파업과 시민 불복종이 권위주의의 정당성을 허물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위로부터 주어진 변화보다 아래로부터 쟁취한 변화가 훨씬 단단한 자유로 이어졌다는 점도 짚었다.
1987년 6월 거리를 메운 한국의 시민들도 그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그러나 비폭력의 길이 늘 승리로 끝난 것은 아니다. 내가 오래 몸담은 중동에서 2011년 무렵 번진 거리의 함성은 튀니지에서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하지만 리비아와 시리아에서는 끝내 총성에 묻혀 긴 내전으로 번졌다.
나는 같은 구호를 외쳤어도 결과가 갈린 까닭을 이렇게 본다. 군대가 누구 편에 섰는지, 시민의 대열이 끝까지 규율을 지켰는지, 바깥 세계가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가 승패를 갈랐다. 비폭력은 마법이 아니다. 그것은 규율이고 인내이며,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용기를 요구한다.
맞으면서도 되받아치지 않은 사람들
그 용기가 얼마나 혹독한지는 단디 이후의 장면이 보여 준다. 1930년 5월 21일, 시인 사로지니 나이두가 이끈 약 2,500명이 다라사나 제염소로 향했다. 그들은 평화롭게 걸어 들어갔고, 많은 이가 경찰에게 맞아 쓰러졌다. 간디는 이미 그달 초에 체포되어 그 자리에 없었다. 그날 쓰러진 이들의 이름을 우리는 대부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맞으면서도 주먹을 쥐지 않았기에, 제국은 자신의 폭력을 세계 앞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올해 비폭력의 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간디가 남긴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했다. 불의에 맞서는 최선의 길은 억압의 잔혹함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비폭력으로 이해의 다리를 놓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빈곤과 불평등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고 했다. 유엔 헌장과 인권, 국제법, 외교라는 평화의 토대가 처벌받지 않은 채 무시되고 있다고도 경고했다. 지난해에는 더 짧게 말했다. 비폭력은 약자의 무기가 아니라 용감한 자의 힘이라고.
열하루 전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그는 희망의 근거를 다른 곳에서 찾았다. 갈라진 공동체를 잇는 자원봉사자와 시민사회 활동가, 평화를 만드는 이들이 행동 하나하나로 아래에서부터 평화를 쌓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력하지 않다는 그의 말은, 비폭력이 지도자의 결단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선택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세계 시민이 오늘 붙들어야 할 세 가지
그렇다면 국경 밖의 전쟁을 화면으로만 보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3가지 자세를 꼽는다.
첫째, 말의 비폭력이다. 사무총장은 2024년 메시지에서 온라인에서 부풀려진 증오가 거리로 넘쳐흐른다고 지적했다. 댓글 하나, 공유 버튼 하나가 오늘날의 돌멩이가 될 수 있다. 상대를 악마로 그리는 언어를 멈추는 일, 확인되지 않은 분노를 퍼 나르지 않는 일이 모든 비폭력의 첫걸음이다. 중동에서 전쟁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한 종교, 한 민족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어 저주하는 글이 쏟아진다. 그 글을 읽고도 따라 쓰지 않는 손, 그것이 내가 아는 가장 가까운 비폭력이다.
둘째, 작고 끈질긴 참여다. 몽고메리의 주민들이 바꾼 것은 하루의 분노가 아니라 381일의 걷기였다. 발트의 사람들이 보여 준 것도 단 15분 동안의 맞잡은 손이었다. 불매와 서명, 투표와 연대처럼 평범한 행동도 오래, 그리고 넓게 이어지면 권력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된다.
셋째, 기억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유엔 결의가 굳이 교육을 앞세운 이유가 여기 있다. 소금 한 줌과 버스 좌석 하나가 세상을 바꾼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는 것, 그것이 폭력의 순환을 끊는 가장 조용한 저항이다. 식탁에서, 교실에서, 교회와 모스크의 마당에서 그 이야기는 계속 전해져야 한다. 다라사나에서 쓰러진 이름 없는 2,500명을 기억하는 일은 역사 공부가 아니라 양심의 훈련이다.
손바닥 위의 소금
나는 오늘 부엌 찬장에서 소금 통을 꺼내 손바닥에 조금 덜어 보았다. 하얗고 가볍고, 너무 흔해서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간디는 바로 그 흔한 것을 골랐다. 누구나 먹고 누구나 집을 수 있었기에, 누구나 저항할 수 있었다.
예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했다(마 5:9, 롬 12:21). 젊은 날 나는 그 말씀이 너무 순진해서 이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무슬림 이웃들 사이에서 이십 년 가까이 살며 깨달은 것은 그 반대였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는 일은 쉽다. 미움 없이 끝까지 서 있는 일이 어렵다. 그리고 세상을 바꾼 것은 언제나 그 어려운 쪽이었다.
비폭력은 상대를 이기려는 기술이기 전에, 상대 안에도 돌이킬 양심이 남아 있다고 믿는 마지막 신뢰다. 그 신뢰를 거둬들이는 순간 우리는 싸우는 대상을 닮아 간다. 중동의 하늘에 아직 포성이 그치지 않은 오늘, 단디의 노인이 집어 든 소금 한 줌이 내 손바닥 위에서 묻는다. 우리는 오늘 누구에게 주먹 대신 손을 내밀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