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하는가
“성경에 쓰인 그대로 믿으면 되지 왜 해석이 필요한가.” 교회 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 문장은 성경의 권위를 지키고 싶다는 선한 의도에서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쓰인 그대로’가 무엇을 뜻하느냐이다. 우리는 성경을 원어가 아니라 번역본으로 읽는 경우가 많고, 문장과 단어를 이미 특정한 언어와 문화의 틀 안에서 이해한다. 같은 단어도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같은 표현도 시인지 역사서인지 비유인지에 따라 읽는 방식이 달라진다. 결국 “나는 해석하지 않고 성경을 읽는다”는 말 자체가 하나의 해석 입장일 수 있다.
예수의 “나는 문이다”라는 말을 누구도 예수의 신체가 나무문으로 변했다는 뜻으로 읽지 않는다. 시편의 시적 표현, 예언서의 상징, 예수의 비유,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이미지 역시 장르를 무시한 채 평면적으로 읽을 수 없다. 보수적 복음주의의 성경해석 문서로 널리 알려진 1982년 ‘시카고 성경해석 성명’조차 성경이 다양한 문학 형식으로 진리를 전달하며, 올바른 주해를 위해 문학적 장르와 형식에 대한 인식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문자적 해석’은 모든 표현을 기계적으로 사실 묘사로 읽는 태도라기보다, 본문이 의도한 의미를 그 문법과 장르에 맞게 파악하려는 노력에 가깝다.
성경 읽기의 출발점은 독자의 느낌이 아니라 본문이다. 먼저 앞뒤 문맥을 보고,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 구조를 살피며,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또한 서사, 율법, 지혜문학, 시, 예언, 복음서, 서신, 묵시문학 등 각각의 장르가 사용하는 표현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비유는 사실 보도문이 아니며, 시는 과학 교과서의 문장처럼 읽을 수 없다. 반대로 역사적 서술을 단지 상징으로만 처리해 버리는 것도 본문이 스스로 주장하는 성격을 무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문자냐 상징이냐’를 먼저 결정해 놓고 본문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이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계시 헌장」은 성경 저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파악하려면 역사적 상황과 당시의 문화, 문학 형식, 말하고 서술하는 관습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가톨릭만의 특수한 원리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복음주의 전통의 문법적·역사적 해석 역시 저자의 언어와 시대, 문화적 배경을 통해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으려 한다. 서로 다른 전통이 적어도 한 지점에서는 만난다. 성경을 존중한다면 오히려 본문의 형식과 언어를 진지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역사 밖에서 떨어진 문서가 아니다. 고대 근동의 사회, 이스라엘의 역사, 바빌론 포로기의 상처, 로마제국의 지배, 제2성전기 유대교의 기대, 초대교회의 갈등 속에서 기록되고 읽혔다. 오늘의 독자가 이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곧바로 본문에 대입하면, 2천 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말씀이 마치 21세기 한국 사회를 직접 겨냥해 작성된 문장처럼 오해될 수 있다.
역사적 맥락을 본다는 것은 성경을 과거에 가두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의 질문을 이해해야 오늘의 적용도 더 정확해진다. 바울의 특정 권면이 어떤 교회 공동체의 갈등 속에서 나왔는지, 예언자의 심판 언어가 어떤 정치·사회적 현실을 겨냥했는지, 복음서의 표현이 당시 유대교와 로마 세계에서 어떤 울림을 가졌는지를 살피는 일은 말씀을 약화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의미의 좌표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2026년 교황 레오 14세도 「계시 헌장」을 설명하면서 성경의 역사적 환경과 문학 형식을 무시하는 접근은 근본주의적이거나, 반대로 본문의 인간적·역사적 차원을 잃어버리는 영해적 독해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개신교 독자가 교황의 교도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 발언은 오늘날 성경 해석에서 역사적 환경과 문학 형식을 함께 살피는 원칙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본문과 역사만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지는 않는다. 성경을 읽는 사람 역시 자신의 경험, 교단 전통, 정치적 입장, 성별과 세대, 상처와 기대를 가지고 본문 앞에 선다. 우리는 완전히 중립적인 독자가 아니다.
철학적 해석학의 대표자인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이해가 언제나 어떤 ‘선이해’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선입견’은 무조건 버려야 할 편견만을 뜻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이미 가지고 있는 사전 판단과 이해의 조건을 의미하며, 그것은 해석 과정에서 다시 질문되고 수정될 수 있다.
그래서 독자의 관점은 제거해야 할 오염물질이라기보다 성찰해야 할 조건이다. 나는 왜 이 구절만 반복해서 강조하는가. 나의 교회는 왜 어떤 본문은 문자적으로 읽고 다른 본문은 문화적 배경을 이유로 다르게 적용하는가. 내가 불편해하는 말씀은 무엇이며, 반대로 내 입장을 정당화하는 구절만 골라 읽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은 신앙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자기기만을 줄인다.
독자의 역할을 인정한다고 해서 “사람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된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된다. 독자의 해석은 본문의 문법과 문맥, 역사적 자료, 성경 전체의 흐름, 신앙 공동체의 오랜 해석 전통과 대화하며 검증되어야 한다. 독자가 의미를 독점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독자의 현실을 완전히 지워서도 안 된다. 해석은 본문과 독자 사이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책임 있는 대화에 가깝다.
문자주의의 가장 큰 위험은 성경을 진지하게 믿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특정한 읽기 방식을 성경 자체와 동일시하는 데 있다. “성경이 말한다”는 문장 뒤에 사실은 “내가 이렇게 해석한다”는 과정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사람을 곧바로 불신앙으로 몰거나, 역사·과학·언어 연구를 신앙의 적으로 오해하기 쉽다.
반대편에도 위험은 있다. 역사적 비평이나 독자 중심의 해석을 이유로 본문이 가진 저항성과 낯섦을 모두 제거한다면 성경은 결국 현재의 가치관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만다. 좋은 해석은 성경을 현재에 맞추어 길들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낯선 말씀이 오늘의 독자를 질문하게 하고, 때로는 자신의 전제와 욕망을 수정하게 만드는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성숙한 성경 읽기는 세 가지 질문을 함께 붙들 필요가 있다. “본문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 말은 처음 어떤 역사와 문화 속에서 들렸는가”, “오늘 나는 어떤 전제를 가지고 이 말씀을 읽고 있는가.” 이 세 질문 중 하나라도 사라지면 해석은 쉽게 기울어진다. 본문만 강조하면 맥락 없는 문자주의로, 역사만 강조하면 과거의 문서로, 독자만 강조하면 주관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단순한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하기는 어렵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성경이 말하려는 바를 얼마나 충실하게 듣고 있는가.” 문자에 충실함은 문자주의와 다르다. 오히려 문학적 장르를 존중하고, 역사적 상황을 살피며, 나 자신의 관점을 성찰할 때 본문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믿음은 해석을 멈추는 일이 아니다. 좋은 해석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성경의 권위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해석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본문 앞으로 돌아가 “내가 정말 제대로 들었는가”라고 묻는 데 있을지 모른다.
성경은 닫힌 정답지가 아니지만 아무렇게나 읽어도 되는 책도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언어를 통해 오늘의 인간에게 말을 거는 텍스트다.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기 위해서는 신앙뿐 아니라 역사적 지식, 언어적 주의, 자기 성찰이 함께 필요하다. 의심과 질문은 이 과정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내 편의대로 소비하지 않고 더 정직하게 만나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