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하나님은 왜 침묵하는가
기도는 대개 말보다 먼저 시작된다. 병실에서, 장례식장에서, 무너진 관계 앞에서, 자녀의 문제를 붙들고 잠 못 드는 밤에 사람은 자신보다 큰 존재를 향해 손을 뻗는다. “살려 달라”, “돌아오게 해 달라”, “이 고통을 멈춰 달라.” 그러나 더 어려운 순간은 기도한 뒤 찾아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다. 병은 계속되고,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며, 폭력과 불의는 멈추지 않는다. 그때 인간은 단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관계 자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대답하지 않는가.”
이 문제를 철학은 ‘신의 숨음’ 또는 ‘신적 은폐’의 문제로 다룬다. 스탠퍼드 철학백과는 신의 숨음을 하나님이 감추어져 있거나, 부재하거나, 침묵하는 것처럼 경험되는 현상과 연결해 설명한다. 현대 종교철학에서는 J. L. 셸렌버그가 특히 ‘저항하지 않는 비신앙’을 근거로,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관계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끝까지 감추지 않을 것이라는 논증을 제기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왜 기도 응답이 늦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현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인식론적·실존적 질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급히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의 현실을 지워 버릴 수 있다. 신앙은 질문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질문을 하나님 앞에 끝까지 가져가는 태도일 수 있다.
침묵은 해석을 낳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답장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를 잊었나”, “관계가 끝났나”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하다. 응답이 없을수록 인간은 하나님의 부재를 추론한다. 셸렌버그의 문제 제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힘을 얻는다. 완전한 사랑이라면 관계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진실하게 찾고도 아무런 현존의 징표를 얻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 유신론 철학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곧 이유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이른바 회의적 유신론은 인간의 인식 한계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대답도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를 뿐 다 이유가 있다”는 문장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병상과 참사 현장에서는 쉽게 잔인한 말이 될 수 있다. 철학적 가능성이 곧 목회적 정답은 아니다.
따라서 신앙은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하나는 침묵을 곧바로 무신론의 증거로 확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침묵을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라고 너무 빨리 설명하는 것이다. 침묵은 해석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다. 믿음은 때로 답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 답이 없는 상태에서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이 ‘응답 없는 기도’를 감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편 13편은 “어느 때까지”라는 탄식으로 시작한다. 욥은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대답을 듣지 못한다고 호소한다. 하박국도 폭력이 가득한 현실에서 “어느 때까지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다.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은 침묵을 경험했고, 그 경험을 신앙의 실패로 삭제하지 않았다.
가장 급진적인 장면은 예수의 십자가다. 마가복음 15장 34절에서 예수는 시편 22편의 탄식을 인용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친다. 기독교의 중심 사건 안에도 ‘버려진 것 같은 경험’이 들어 있다. 이것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 항의하는 언어,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는 언어가 곧 불신앙의 언어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겟세마네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가능하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십자가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았다. 바울 역시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 간구했으나,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고통 제거 대신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응답을 받는다. 여기서 기도 응답은 ‘내가 요청한 결과가 발생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성경은 어떤 기도는 현실의 제거가 아니라 현실을 견디고 통과할 힘의 형태로 응답될 수 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고 모든 미응답을 “사실은 더 좋은 응답”이라고 미화해서는 안 된다. 어떤 상실은 끝까지 상실이고, 어떤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 성경의 탄식은 바로 그 돌이킬 수 없음 앞에서 신앙이 울 수 있도록 허락한다.
기도를 거래로 이해하면 미응답은 곧 실패가 된다. “내가 충분히 간절하지 않았나”, “믿음이 부족했나”, “기도 방법이 잘못됐나.” 이런 해석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두 번째 상처를 줄 수 있다. 성경의 기도를 주문이나 성취 공식으로 바꾸면, 하나님은 인격적 타자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실행하는 수단이 된다.
기도의 철학적 의미는 오히려 통제의 포기에서 드러난다. 기도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세계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다. 겟세마네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라는 문장은 욕망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는 먼저 잔이 지나가기를 원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기도는 욕망을 숨기는 훈련이 아니라 욕망을 정직하게 드러낸 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관계를 끊지 않는 행위다.
그래서 응답 없는 기도는 역설적으로 기도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만 하나님을 찾았다면 원하는 것이 사라지는 순간 관계도 끝난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도 다시 하나님을 부른다면 기도는 거래에서 관계로 이동한다. 시편의 탄식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탄식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말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언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침묵할 때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억지로 의미를 만들어 내지 않아도 된다. 모든 고통에 즉시 원인을 붙이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불안을 잠재우려는 해석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왜 허용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정직함이 필요하다.
둘째, 탄식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언제까지”, “어디 계십니까”라는 질문은 성경적 기도의 일부다. 의심을 억압한다고 믿음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문을 금지하는 공동체는 사람을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먼저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셋째, 침묵을 인간의 무책임을 정당화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폭력과 가난, 재난과 차별 앞에서 “기도하자”는 말이 행동을 대신한다면 기도는 현실 회피가 된다. 하박국의 기도는 폭력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인간이 해야 할 책임까지 멈추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는 설명자가 아니라 동행자가 되어야 한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 앞에서 가장 필요한 말은 “다 뜻이 있다”가 아닐 수 있다. 함께 울고, 식사를 챙기고, 병원에 동행하고, 침묵 속에 곁을 지키는 일이 더 신앙적인 응답일 때가 있다. 하나님의 침묵을 인간의 사랑이 메울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의 냉담함으로 그 침묵을 더 깊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는가.” 이 질문에 누구도 모든 경우를 설명하는 하나의 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철학은 신의 숨음이 실제로 유신론을 압박하는 중요한 문제임을 보여 주고, 성경은 그 압박을 외면하지 않는다. 시편 기자도, 욥도, 하박국도, 예수도 침묵과 버려짐의 언어를 통과했다.
기독교 신앙의 대답은 침묵의 원인을 완벽하게 해설하는 데 있기보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버려짐과 고통의 자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십자가의 주장에 있다. 그러나 그 주장조차 고통받는 사람에게 강요되는 설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때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안다”고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나는 아직 모르지만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능력에 더 가깝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신앙의 실패를 증명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을 무조건 성공한 기도로 포장할 필요도 없다. 어떤 기도는 끝내 물음표로 남는다. 그리고 바로 그 물음표 속에서 인간은 다시 묻는다. 나는 하나님을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로만 믿었는가, 아니면 침묵 속에서도 말을 걸 수 있는 존재로 믿는가. 어쩌면 성숙한 신앙은 모든 질문의 답을 얻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답이 오지 않는 밤에도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