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뇌가 멈추는 시간, 소속감이 사라진 아이들의 글
▪️편리함의 청구서: '굴 파기'를 멈춘 아이들의 인지적 부채
▪️설익은 씨앗의 강제 발화, 빼앗긴 정체성의 시간
▪️투박한 100% 오리지널 IP와 '인간 기여도'의 아이러니
▪️아이들은 훈련받는 기계가 아니라 시간을 들여 자라는 존재다
▪️[전문 용어 사전]
▪️[칼럼니스트 소개]
▪️[같이 읽으면 좋을 기사]

태블릿 화면의 디지털 격자무늬 옆에 만년필로 글을 쓰다 짓이겨 지운 흔적과 잉크 자국, 작은 손낙서들이 가득한 종이가 서로 대비되어 놓여 있는 모습을 묘사한 일러스트
뇌가 멈추는 시간, 소속감이 사라진 아이들의 글
미국 고교 및 대학생의 67~90%가 에세이 작성 등 학교 과제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하고 있다. 2026년 8월 17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학생들은 이미 글쓰기의 고된 과정을 AI에게 기꺼이 넘겨주고 있다.
한국 역시 2026년 10월 국가교육위원회의 대입 개편안 시안 발표와 2027년 3월 최종 확정을 앞두고, 서·논술형 평가 확대와 AI 채점 도입이 주요 의제로 논의되는 중이다.
우리는 깊이 고민해야 한다. 편리함을 좇아 글쓰기의 어려움을 기술로 완벽히 제거했을 때, 빈 종이를 마주한 아이들의 뇌와 자아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편리함의 청구서: '굴 파기'를 멈춘 아이들의 인지적 부채
인지심리학자 로널드 T. 켈로그(Ronald T. Kellogg)의 연구에 따르면 기본적인 설득 에세이를 작성하는 과정은 육체노동인 '굴 파기'에 맞먹는 지독한 인지부하를 요구한다.
생각을 부호화하고 텍스트를 해석하며 실행기능을 통제하는 이 고된 과정 자체가 사고력을 비약적으로 발달시킨다. 하지만 그동안 채점 편의를 위해 굳어진 '5단락 에세이' 형식주의 교육은 역설적이게도 AI가 가장 완벽하고 쉽게 복제할 수 있는 모방의 표적이 되었다.
미국 MIT 연구진의 조사 결과는 서늘한 진실을 경고한다. AI와 함께 글을 쓴 사람들은 뇌 활동이 낮게 나타났으며, 자신이 쓴 내용에 대한 소속감이 약해지는 현상을 겪었다. 2026년 6월 국제 학술지(PMC)에 발표된 중국 대학생 353명 대상의 실증 연구에서도 비슷한 경고가 나온다.
인지 작업을 AI에 넘기는 '인지적 외주화(cognitive offloading)' 깊이가 깊어질수록 인지적 자율성을 포기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다. 심지어 전체의 25.8%는 자발적 사고가 불가능에 가까운 '고도 사용-고도 의존' 하위 집단으로 전락했다.
또한 2025~2026년 발표된 최신 연구 123편을 체계적으로 검토한 스코핑 리뷰는, 메타인지 지원이 없는 AI 사용이 자신의 실제 능력과 무관하게 자신감만 상승하는 '거짓 자기효능감'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설익은 씨앗의 강제 발화, 빼앗긴 정체성의 시간
이러한 객관적 지표들을 바탕으로, 학계는 세 가지 생존 원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첫째, 브레인스토밍 단계에서는 AI를 아이디어 확장을 위한 조력자로 쓰고 초고 작성은 인간이 주도하도록 글쓰기 전·중·후 5-3-2 질문을 던지는 '메타인지 프레임워크'의 도입이다.
둘째,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AAWP 모델 기반의 '가시화된 의사결정' 평가다. 브레인스토밍부터 퇴고까지 전 과정을 포트폴리오로 기록하고 5분 구술 평가를 병행하는 방식이다.
셋째, 기기를 모두 끄고 펜과 종이로 초고를 재작성하는 오프라인 작문 시간의 확보다.
훌륭한 학술적 대안들이다. 그러나 25년 넘게 창작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과 호흡해 온 필자의 시선에서 볼 때, 첫 번째 원칙인 '초기 브레인스토밍 단계의 AI 개입'에 대해서는 조금 더 본질적이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초기 아이디어 확장 단계에서 AI를 조력자로 사용하는 것이 과연 어느 연령대의 아이들까지 유효할까. 성인조차 초기에 자신의 생각이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다면 AI가 제시하는 여러 선택지에 무기력하게 끌려가기 마련이다. 하물며 어린아이들의 브레인스토밍은 어떠한 정형화된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변의 따뜻한 관심을 받고 나누는 친밀한 수다와 질문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아한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과제를 어떻게 대하고 어떤 식으로 해내고 싶은지에 대한 자신의 인식 상태를 스스로 깨닫고 입 밖으로 꺼내게 하는 데 있다.
그 과정을 이뤄내기 위한 로드맵을 하나씩 찾아갈 때, 곁에 있는 어른들은 아이가 스스로 생각의 끝에 도달할 때까지 온전히 기다려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시간을 단축하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AI를 들이밀어 아이디어를 강제로 확장하려 든다면, 그것은 설익은 씨앗을 강제로 발화시키는 짓과 같다.
"이렇게 쉽게 되는데 뭘 그렇게 고민을 하나." 한 번 이 기계적 편리를 맛본 아이들에게 스스로 해내려는 의지는 급격히 감소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기 귀찮아지고 AI의 대답에 쉽게 수긍하며, 인지적 외주화는 자신도 모르게 뇌를 잠식한다.
글쓰기는 지우고 고치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자신이 하려던 생각의 끝과 감정의 실체를 비로소 발견하는 일이다. 그 치열한 대면 속에서 정체성이 확립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뛰어난 도구를 쥐여주면, 도구를 다루는 주인이 아니라 알고리즘에 휘둘리는 종속자가 될 뿐이다.

노트북 화면에서 흘러나온 푸른빛 홀로그램 집게가 화분 속 작은 새싹의 껍질을 강제로 비틀어 벌리는 장면을 안경 쓴 아이가 책상 앞 수풀 사이에서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일러스트
투박한 100% 오리지널 IP와 '인간 기여도'의 아이러니
그러므로 AI를 쓰는 단계는 어린아이들일수록 맨 나중이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투박하고 허술해 보일지라도, 오랜 시간 스스로 고민하여 완성한 결과물에 대한 성취감은 거대하다. 아이가 백지위에서 직접 만들어낸 세계의 이야기와 글, 그림이라면 그것은 확고한 원초적인 IP가 된다.
이 원초적인 IP가 있어야만 훗날 AI 도구를 활용해 영상이든 음악이든 다양한 콘텐츠로 변형을 시도할 때 의심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교육계의 서글픈 모순을 목격한다. 처음부터 AI의 도움으로 그럴듯한 결과물을 뽑아내게 해놓고, 이제 와서 평가를 받아야 하니 '인간 기여도'를 증명하라고 한다. '기여'라는 단어를 다시 들여다보라. 이것은 이미 창작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자백하는 셈이다.
오리지널 IP가 분명하다면 인간의 관여도는 변함없는 100%다. 아직 화려한 완성품이 필요하지도 않은 아이들에게 성급히 AI를 허가해놓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단축시켜 놓고 기여도를 따져 묻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아이러니인가.
아이들은 훈련받는 기계가 아니라 시간을 들여 자라는 존재다
업무 효율화를 위해 AI를 쓰는 성인과 아이들의 교육은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훈련시키고 데이터로 학습시켜 키워내는 AI가 아니다. 그들은 시간을 들여 자라나는 존재다. AI를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기계의 도움을 청하게 만드는 것은, 개개인이 지닌 고유한 인지 능력을 영구히 퇴화시키는 일이다.
거대한 정책의 흐름과 기술의 속도를 당장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부모와 현장의 교육자들은 결단해야 한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글을 쓰며 고민의 지평을 넓히고 상상의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해 나가는 이 절대적인 시간은 결코 양보하거나 무엇과도 바꾸어선 안 된다.
미국 AP Capstone 연구에서도 입증되었듯, 기기를 끄고 백지를 마주하는 오프라인 창작의 고요한 시간은 AI 의존도를 낮추고 메타인지를 성장시킨다. 그 느리고 투박한 창작의 과정이 없다면 우리 아이들을 AI의 노예가 아닌, 스스로 질문하고 온전한 자기만의 우주를 빚어내는 인간으로 키워내기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전문 용어 사전]
▪️인지적 외주화: 글쓰기나 생각의 생성 등 고차원적인 사유 과업을 인공지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처리함으로써, 인간 스스로의 자발적 인지 자율성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부작용이다.
▪️소유감 약화: 인공지능이 대필해 준 결과물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뇌 활동이 저하되어, 자신이 제출하는 문장에 대한 주체적인 창작 책임감과 인지적 소속감을 상실하는 심리적 상태이다.
▪️거짓 자기효능감: 인공지능 도구에 의존해 얻은 매끄러운 결과물을 실제 자신의 비판적 사고력과 글쓰기 역량으로 착각하여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게 되는 현상이다.
▪️원초적 IP: 알고리즘이 복제해 낸 차가운 결과물이 아니라, 다소 서툴고 투박할지라도 학습자가 백지 위에서 고뇌하며 연필 끝으로 직접 빚어낸 100% 고유한 독창적 지적 자산이다.
▪️인지부하: 사유를 문장으로 조직하는 과정에서 뇌의 작업기억이 감당해야 하는 정신적 노동의 총량으로, 이 고통을 스스로 돌파할 때에만 실질적인 사고 능력이 성장한다.
※ 이 기사의 이미지 제작 및 팩트체크 과정에는 생성형 AI 도구가 보조적으로 활용되었으며, 모든 정보의 최종 검증과 편집 책임은 인간 기자가 담당했습니다.
[칼럼니스트 소개]
책마법사(최상희)는 상상하는 인간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스토리 아티스트이자 언론인이다. 2001년부터 아날로그 창작 교육과 북아트를 통해 상상력의 가치를 탐구해 왔으며, 2023년부터는 생성형 AI와 새로운 창작 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인터넷 신문 The Imaginary Pocus를 창간해 '상상하는 인간 중심 저널리즘'을 바탕으로 인간의 상상력과 창작, 기술이 만나는 지점을 기록하며 시사와 문화, 기술을 잇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같이 읽으면 좋을 기사]
[Pocus 창작교육 칼럼] 5화: AI 활용 교육에 왜 그림일기가 필요했을까
[Pocus 창작교육 칼럼] 6화: 문해력 시험은 '시험'을 여섯 번 쓴 아이를 몇 점 줄까
[Pocus 창작교육 칼럼] 7화: 수능 서·논술형 AI 채점, 효율적인 평가로 무엇을 얻으려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