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AI가 먼저 그은 ‘문체 모방’의 선
▪️문체는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지문이다
▪️이름을 쓰지 않아도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있었다
▪️아이의 문장을 함부로 고치지 않는 이유
▪️자기 문장을 써본 아이가 저작권을 이해한다
▪️[전문 용어 사전]
▪️[칼럼니스트 소개]
▪️[같이 읽으면 좋을 기사]
AI가 먼저 그은 ‘문체 모방’의 선
최근 챗GPT가 “특정 작가처럼 써달라”는 직접적인 문체 모방 요청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대신 해당 작가의 고유한 목소리를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장르적 분위기나 서사적 특징처럼 보다 넓은 요소를 반영한 새로운 글을 제안하는 방식이다.
생성형 AI를 둘러싼 작가와 출판계의 저작권 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법적 위험을 줄이기 위한 선제적 방어 조치로 해석된다. 이 변화가 곧 문체의 법적 권리가 완전히 확립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스타일 자체가 어디까지 저작권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럼에도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오기 전에 대형 AI 플랫폼이 먼저 제품 안에 모방의 경계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가볍지 않다. 인간 작가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문체를 아무 제약 없이 호출해 제공하는 일이 더는 지속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을 서비스 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 교육에도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에게 더 능숙하게 AI를 사용해 매끄러운 문장을 얻는 방법부터 가르쳐야 할까. 아니면 아직 서툴더라도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한 문장을 만들어보는 시간부터 지켜주어야 할까.

AI의 문체 모방 거부 알림 앞에 펼쳐진, 챗GPT도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아이만의 독창적인 이야기와 사고의 지도를 표현한 일러스트
문체는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지문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뷔퐁은 “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문체는 단어 몇 개를 고르고 문장을 꾸미는 기술이 아니다. 한 사람이 무엇을 읽고,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에 감동하며 살아왔는지가 문장에 스며든 결과다. 그 안에는 사상과 철학, 감성과 경험, 문해력과 사고의 흐름이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문체는 글의 지문과도 같다. 다른 작가가 자주 쓰는 어휘나 문장의 리듬을 따라 할 수는 있다. 비슷한 분위기와 서사 구조를 흉내 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문장을 만들어낸 삶의 시간까지 가져올 수는 없다. 무엇을 오래 바라보았는지, 어떤 질문 앞에서 멈추었는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하며 살아왔는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체가 생기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읽고, 생각하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일이 반복되면서 자기만의 언어가 조금씩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문체는 아무나 흉내 낸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함부로 흉내 내서도 안 된다. 이번 변화는 AI가 문체를 만들 수 없다는 선언이라기보다, 특정 창작자의 오랜 축적물을 무단으로 재현해 제공하는 행위가 법적·윤리적으로 부담스러운 영역이 되었다는 판단에 가깝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들의 글쓰기를 다시 보게 된다. 문체는 유명 작가가 된 뒤에야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직 맞춤법이 서툴고 문장이 자주 끊기는 아이들의 글에서도 이미 자신만의 생각과 리듬은 시작되고 있다.
이름을 쓰지 않아도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있었다
25년 동안 아이들과 이야기를 쓰고 책을 만들면서 늘 신기하게 느낀 일이 있다. 수업이 끝난 뒤 아이들이 쓴 글을 모아 하나씩 읽다 보면, 이름을 쓰지 않은 글도 누가 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글을 쓴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쓸 때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정성스럽게 쓴다. 생각의 속도가 손으로 쓰는 속도보다 빨라 중간중간 내용이 빠지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이 문장보다 앞서 달려가기도 한다. 글씨는 삐뚤고 문장은 매끄럽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분명 그 아이만의 사고의 흐름이 있다.
어떤 아이는 사건을 빠르게 밀고 나가고, 어떤 아이는 등장인물의 마음을 오래 들여다본다. 어떤 아이의 이야기에는 엉뚱한 유머가 가득하고, 또 다른 아이는 사소한 장면에 꽂혀서 꼼꼼히 기록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식도, 장면을 연결하는 방식도, 결말을 맺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 문장을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사고의 지도를 새긴다. 무엇을 먼저 쓸지, 무엇을 생략할지, 어떤 단어가 자신의 마음과 가장 가까운지를 결정하는 순간마다 생각의 길이 하나씩 생겨난다. 지우고 다시 쓴 자리, 질문을 받고 멈춘 자리, 끝까지 남겨둔 문장들이 모여 그 아이만의 창작 로그가 된다. 문체는 바로 그 기록 위에서 천천히 자란다.
아이의 문장을 함부로 고치지 않는 이유
아이들은 자신이 쓴 글을 어른이 함부로 고쳐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른에게는 다듬어야 할 문장일지 모르지만, 아이에게는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낸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문장을 억지로 고치지 않았다. 먼저 그 문장은 무슨 뜻으로 쓴 건지 물었다. 아이가 자신이 쓴 문장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그대로 두었다. 다만 독자가 읽을 때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거나 헷갈릴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의 문장을 다시 바라본다. 설명을 더할지, 다른 단어로 바꿀지, 그대로 남겨둘지는 대화를 거친 뒤 스스로 결정했다.
어떤 아이는 한 문장 한 문장을 오래 곱씹으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또 어떤 아이는 생각나는 대로 후다닥 쓴 뒤 처음부터 소리 내어 읽으며 빠진 내용을 찾아냈다. 방법은 달랐지만 중요한 것은 같았다. 자신이 쓴 문장이었고, 자신이 고칠 문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단순히 맞는 문장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다시 읽고, 표현에 책임지는 법을 배운다. 나는 이것을 저작 주권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내 문장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문장도 함부로 다루지 않게 된다.
자기 문장을 써본 아이가 저작권을 이해한다
자기 힘으로 이야기를 써본 아이들은 다른 작가의 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생각했을까”, “이렇게 긴 이야기를 어떻게 끝까지 썼을까” 하고 묻는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고민해본 아이는 다른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오래 그려본 사람은 다른 화가의 선을 쉽게 보지 않는다. 요리를 해본 사람은 한 접시의 음식에 들어간 수고를 안다. 창작은 자신이 고민한 만큼 타인의 고민도 보게 만든다. 저작권을 침해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외우게 하는 것보다, 자기 손으로 한 문장을 쓰고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하게 하는 일이 자신의 문체를 새기는 저작권 교육이 될 수 있다.
생성형 AI는 앞으로 더 빠르고 더 완성형 문장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이 그 속도만 따라간다면 아이들은 자기 언어를 만들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 문장을 고르는 소비자가 될 수 있다. AI 시대의 창작교육이 지켜야 할 것은 유명 작가처럼 쓰는 기술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자기 생각을 자기 언어로 표현하며, 그 문장에 책임지는 힘이다.
챗GPT가 특정 작가의 문체를 직접 흉내 내는 요청에 선을 긋기 시작한 지금, 우리도 아이의 서툰 문장 앞에서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더 멋지게 고쳐주기 전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묻고, 수정할 권리를 아이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문체는 글의 지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지문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 글자씩 써 내려가며 사고의 지도를 새긴다. 그 지도 위에 경험이 쌓이고, 질문이 더해지고, 삶의 시간이 켜켜이 쌓일 때 비로소 한 사람만의 문체가 만들어진다. AI 시대 창작교육이 지켜야 할 것은 글쓰기 기술만이 아니다. 바로 그 시간을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전문 용어 사전]
▪️ 뷔퐁 (Georges-Louis Leclerc, Comte de Buffon): "문체는 곧 사람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라는 명언을 남긴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자연학자. 문체를 단순한 글쓰기 기술이 아닌 한 사람의 사고와 인격이 담긴 독창적인 결실로 보았으며, 칼럼에서 강조하는 "문체는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지문"이라는 관점의 철학적 뿌리가 됨.
▪️ 문체: 글의 지문이자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지문. 단순한 문장 구성 기술이나 매끄러운 수식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시선과 생각의 흐름이 담긴 목소리를 의미함.
▪️ 문체 모방: 특정 작가의 고유한 글꼴이나 목소리를 그대로 재현해 내는 행위. 최근 생성형 AI 플랫폼이 법적 위험을 방지하고 창작 경계를 설정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거부하거나 제약을 두기 시작함.
▪️ 챗GPT (ChatGPT): 칼럼에서 언급되는 대표적인 대화형 생성형 AI 서비스. 특정 작가의 고유한 목소리를 그대로 복제해 달라는 직접적인 모방 요청을 거부하고 선제적으로 경계를 두기 시작한 사례로 제시됨..
▪️ 사고의 지도: 글을 쓸 때 무엇을 먼저 쓸지, 무엇을 생략할지,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 결정하는 순간마다 생겨나는 생각의 길. 이 지도 위에 시간과 경험이 쌓여 자신만의 문체로 완성됨.
▪️ 창작 로그: 글을 쓰며 지우고 다시 쓴 자리, 질문을 받고 멈춘 자리, 끝까지 남겨둔 문장들이 모인 생각과 고민의 기록. 문체는 바로 이 기록 위에서 천천히 자라남.
▪️ 저작 주권: 자신이 쓴 문장을 스스로 점검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다시 읽으며 표현에 책임지는 힘. 내 문장의 소중함을 체득함으로써 타인의 창작과 노력을 깊이 존중하는 태도의 바탕이 됨.
[칼럼니스트 소개]
책마법사(최상희)는 상상하는 인간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스토리 아티스트이자 언론인이다. 30년 가까이 아날로그 창작 교육과 북아트를 통해 상상력의 가치를 탐구해 왔으며, 2023년부터는 생성형 AI와 새로운 창작 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인터넷 신문 The Imaginary Pocus를 창간해 '상상하는 인간 중심 저널리즘'을 바탕으로 인간의 상상력과 창작, 기술이 만나는 지점을 기록하며 시사와 문화, 기술을 잇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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