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가장 먼저 평범해지는 건 성적이 아니라 아이들의 생각이다
▪️부모는 AI를 걱정하지만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들어주는 것과 대신 판단해주는 것 사이
▪️25년, 아이들은 예외 없이 스스로 움직였다
▪️결국 무엇을 넘겨주는 일인가
▪️[전문 용어 사전]
▪️[칼럼니스트 소개]
▪️[같이 읽으면 좋을 기사]
지난달 유네스코는 2026년 ICT in Education Prize의 주제를 발표했다. "AI로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를 다시 상상하기(Reimagining creativity and critical thinking with AI)." 국제기구가 상의 주제로 내건 것은 효율이 아니라 방어였다.
AI가 인간의 능력에 미치는 "평탄화 효과(flattening effects)"에 맞서, 학습자의 창의성과 상상력, 비판적 사고를 지키자는 것이다.
상금 2만5천 달러보다 눈길을 끄는 건 이 주제 선정 자체다. 국제기구가 처음으로 AI 교육을 창의성을 지키는 문제로 못박았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이가 만든 이야기책을 보며 아이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며 눈을 맞추는 부모의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
가장 먼저 평범해지는 건 성적이 아니라 아이들의 생각이다
유네스코가 말하는 평탄화 효과는 성적이 균일해지는 문제가 아니다. AI가 질문에 답을 주고,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대신 써주면서, 그림의 구도까지 제안할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아이가 스스로 골똘히 고민하다가 내놓는 자기만의 생각이다.
여러 아이가 같은 AI에게 같은 식의 질문을 던지면, 돌아오는 답은 비슷비슷해진다. 서로 다른 아이들의 생각이 하나의 평균으로 수렴되는 것, 이게 평탄화다.
문제는 이 평탄화가 성적표에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정답에 빨리 도달할수록 좋은 평가를 받기 쉬워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는 더 알아채기 어렵다.
부모는 AI를 걱정하지만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같은 시기 크레욜라와 Talker Research가 미국의 8~12세 자녀를 둔 부모 2천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도 비슷한 지점을 가리켰다.
부모 73%는 창의성을 자녀의 필수 역량으로 꼽았고, 35%는 AI가 아이의 창의적 사고력을 떨어뜨릴까 걱정했다. 그런데 정작 같은 걱정을 하는 아이는 22%뿐이었다.
아이들이 실제로 원한다고 답한 건 새로운 AI 도구가 아니었다. 내 아이디어를 물어봐주고 들어주는 어른(52%), 그리고 직접 만들고 그릴 수 있는 시간(46%). 부모는 AI로 인한 아이들의 학습능력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네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
25년간 아이들과 스토리 팝업북을 만들어온 필자는, 전쟁이 일어나서 다 죽고 왕과 어릿광대만 살아남은 이야기를 쓴 한 아이에게 "그래서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났어?"라고 물었다.
사실 ‘전쟁이 나서 다 죽었다.’라고 딱 한 줄로 썼기 때문에 보통은 더 물어볼 말도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시작하자 마자 다 죽었다고 쓴 아이도 ‘그 다음’ 이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만들어냈다.
"어릿광대가 자기들만의 아지트로 왕을 데려갔어요. 들키지 않으려고 왕관이랑 옷을 구덩이에 파묻었어요." 왕이 들키면 안 된다는 상황 논리도, 왕관을 숨긴다는 구체적 행동도,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아이 혼자 만들어낸 것이다.
질문이 통했던 건 기술 때문이 아니라, 필자가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이어가며 궁금해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건 ‘네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같은 원리가 거꾸로 작동하는 장면도 봤다. 공개 수업에서 부모와 나란히 앉아 각자 책을 만드는 시간, 어떤 부모는 자기 책은 만들지 않고 아이 것만 들여다보며 틀린 글자와 실수만 짚었다.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이 바뀌고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들어주기의 반대는 무관심이 아니라 지적과 평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스스로 확장해가는 아이들
평소 교실에서도 집에서도 말이 없던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게 되면서부터 수다쟁이로 바뀌었다. 공개 수업 날 그 모습을 처음 본 엄마는 깜짝 놀랐다. 자기 아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아이인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자기 아이디어, 문득 떠오른 생각, 갑자기 바꾼 결말을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모가 아이와 하는 글쓰기나 일기 쓰기 학습으로 서로 스트레스를 주고 받는다. 각종 프로그램과 비싼 학원에 보내지만,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좋아하게 만들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 이야기부터 수다 떨듯 풀어놓기 시작하면, 그 시간은 억지로 해야 하는 과제에서 기다리는 시간으로 바뀐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스스로 빠져드는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는 흐뭇해지고, 내 아이의 엉성한 문장과 서툰 그림에도 감동을 받는다. 여기에 좋은 질문까지 더해진다면 상당히 오랜 시간 자신의 상상 세계를 펼쳐가며 구체화 하고 꿈을 현실로 이뤄가는 근사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
내 아이의 주도적인 성장의 첫걸음
국제기구가 데이터로 확인한 것을, 필자는 25년간 현장에서 먼저 봐왔다. 아이의 생각이 평범해지는 것을 막는 일도, 아이가 스스로 움직이는 힘을 갖게 하는 일도 결국 같은 곳에서 시작된다.
섣부른 걱정보다 그 시간에 아이의 수다를 듣고 맞장구치며 바라봐 주는 것.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어른만큼 크지 않다.
내 아이의 주도적인 성장의 첫걸음은 아이가 마음껏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고, 그건 어른이 먼저 온전히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 시간을 함께 누린 자리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다음 화에서 하나씩 풀어보기로 하자.
[전문 용어 사전]
▪️평탄화 효과(flattening effects): UNESCO가 2026 ICT 교육상 주제에서 언급한 개념으로, AI가 사람들의 사고와 표현을 비슷하게 만들어 개인의 고유성을 지우는 현상을 말한다.
▪️ICT in Education Prize: 유네스코가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혁신적 교육 사례에 수여하는 국제상. 2026년 주제는 "AI로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를 다시 상상하기"다.
▪️크레욜라·Talker Research 설문: 미국 크레욜라가 의뢰하고 Talker Research가 수행한 설문으로, 8~12세 자녀를 둔 부모 2천 명과 그 자녀를 대상으로 AI 시대 창의성 인식을 조사했다.
▪️창작 로그: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시작부터 발전 과정까지 전부를 기록해두는 방식. 포트폴리오와 달리 과정 자체가 저작권·정체성의 근거가 된다.
[칼럼니스트 소개]
책마법사(최상희)는 상상하는 인간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스토리 아티스트이자 언론인이다. 30년 가까이 아날로그 창작 교육과 북아트를 통해 상상력의 가치를 탐구해 왔으며, 2023년부터는 생성형 AI와 새로운 창작 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인터넷 신문 The Imaginary Pocus를 창간해 '상상하는 인간 중심 저널리즘'을 바탕으로 인간의 상상력과 창작, 기술이 만나는 지점을 기록하며 시사와 문화, 기술을 잇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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